
게시판을 빽빽하게 채운 의뢰 종이를 떼어 내는 손길 끝에는 상냥함과도 비슷한 무언가가 옅게 물들어 있었다. 상당한 재력으로 이미 에덴 내에서도 유명해져 있었으면서도, 그가 지상을 되찾으러 떠난 후에도 한동안 뭇 사람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을 만큼이나 재력 부문에서는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으면서도- 새로운 금전을 향한 갈망을 놓지 않은 이가 커다란 의뢰 게시판 전체를 빠르게 눈으로 훑어 내려갔다.
아직 동이 트기도 전의 이른 시각. 대부분의 하루가 시작하기도 전이었으나 체이서 길드에만큼은 사람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시각이었다. 물론 그 시각에마저 길드 내부가 휑하다는 점 역시 그 길드의 이름값을 한다 보아도 무방하겠지만.
금빛 눈동자가 여러 의뢰서를 스쳐 지났다. 전단지 하나 더 붙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와중에 군데군데 비어 있는 곳은 이미 발 빠른 누군가 가져간 것이겠지. 론드는 알고 있다. 에덴을 떠나기 전에 비해서 조금 더 커진 게시판. 잃어버리는 이들은 어찌나 그렇게 많은지, 이미 과포화 상태임에도 점점 늘어나고 있을 뿐이다.
스치듯 게시판을 전반적으로 훑는 눈길에 꽤나 좋은 의뢰서가 들어 왔다. 사람을 찾는다는 의뢰서- 옆의 것. 보수도 괜찮고 일도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어둠의 뒷거래들이 주로 들어오는 칙칙한 게시판에서 눈에 띌 정도로 하얀 종이에 반듯한 필체가 마음에 든다. 손을 뻗어 의뢰서를 쥐기만 하면, 완벽한 새벽녘에서 시작하는 완벽한 하루가 되겠지.
“ 당신 뭐야? “
새하얀 의뢰서를 낚아채더니 반으로 찢는 손길이 제법 여유롭다. 그 태평함 끝에는 으레 보던 것과 같은 엷은 웃음. 십 년 넘게 본 모습은 익숙하다 못해 질릴 정도의 것이었겠으나, 또 그는 제법 사람을 쉽게 질리게 만들지 않는 재주가 있기도 했다.
「어둠의 체이서」가 이런 의뢰서나 받으면 어떻게 합니까? 「황혼의 론드」…… 투덜대는 목소리 끝에 미묘하게도 익숙한 향이 섞여 있었다. 또 마셨나? 익숙한 일이라는 양 내뱉는 목소리에 섞여 있는 것은 반 정도의 심드렁함과, 반 정도의 안정감. 어둠의 체이서라느니, 이거 놓으라며 오른손에 잠들어 있는 드래곤 친구라느니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카멜을 대충 길드 의뢰 게시판에 기대어 세워 둔 아이비가 평상시와 다를 바 하나 없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 이런 시시한 거 말고, 의뢰 하나 가져왔는데~ 할 생각은? “
카멜에 관한 건가? 보수를 먼저 듣고 생각해 보도록 하지. 얼마나 마신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아직도 게시판에 제 뺨을 기대고 선 쪽을 보던 론드가 퍽 심심한 어조로 답했다.
체이서 길드의 하루는, 남들보다 조금 빠르게 시작하는 법이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