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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높이 치던 파도가 불이 붙은 뱃머리에 부딪쳐 아래로 내려앉았다. 아무도 키를 잡지 않아도 제가 갈 곳을 알아서 향하는 배는, 그 누구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안이었기에 의구심을 가질 법했으나 그런 류의 사소한 일에 의심을 품기에는, 간만의 느긋한 날이 조금 아깝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의 끝은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으나, 뱃머리의 불빛 근처에서 부서지는 파도만큼은 퍽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간혹 반대 방향으로 흩어지는 물방울은 노란빛을 띠고 있기도 했다. 붉은색, 그리고 노란색. 여름의 계절 하에 놓여 있을 때에는 한없이 열정적이고 사람을 뜨겁게 만드는 색이었다면, 그로부터 약간 벗어나기 시작하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류의 색채.

 

 바람이 멎었다.

 

 덜컹, 하는 느낌과 함께 배가 어딘가에 정박했다. 동료의 불빛에, 뱃머리의 불빛에 의지하여 주위를 둘러 보아도 너른 백사장과 바다가 전부인지라 이곳이 어디인지는 확실치 않다.

 

 맑은 바람이 몸을 훑고 지나간다. 폐를 가득 채웠던 개운한 공기가 들숨과 함께 허공으로 흩어지면, 찰나를 놓칠 새라 새로운 바람이 실려 온다.

 

 잘게 부서진 식물 가루의 향 비슷한 것이 났다. 시각에 의존해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으니 최대한 감각을 곤두세우는 것으로 자신과의 합의를 보았다. 별도 달도, 하물며 저 창공의 에덴마저도 뜨지 않은 새카만 하늘 위로 푸른 불빛이 가벼이 흩어졌다. 코끝에 엉겨 붙는 건 약간은 비릿한 바다의 향, 적당히 따듯하며 적당히 시원한 바람의 내음. 그 끝에 희미하게 따라 오는 제법 익숙한 향.

 

 잘 익은 곡식이 싣고 오는 풍요의 냄새가 혀끝에 녹아 사라졌다.

 

 감아 내린 속눈썹 위로 언젠가의 정경이 떠오른다. 농경 지대를 우연찮게 지나칠 즈음 바람에 실려 오던 낟알의 속삭임. 티없이 맑고 높아 구름 한 점 찾아 보기 힘든 하늘 아래 발끝에 채이는 돌부리 끝에 묻어 있던 곡식의 찌꺼기. 길에 마구잡이로 그어진 금은 한바탕 노란색을 쏟은 밀밭에서 숨바꼭질에 술래잡기에 온갖 놀이를 하던 추억을 담아냈었고, 영 제구실을 못하는 것만 같은 허접한 이정표도 가을꽃이 만개한 밭에서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지 않기에는 썩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을 수 있었던 시간의 나날.

 

 배에서 내려서자, 발끝에 닿는 모래는 아이슈타트의 것만큼 곱지는 않았으나 그런대로 나쁘지 않은 감촉이었다. 모래 사이로 채 벗겨지지 않은 곡식의 껍질이 밟혔다. 신이라는 작자의 축복을 받아, 풍요가 넘치다 못해 바다의 코앞까지 흘러나와버린 천상의 대지.

 

 서늘한 공기가 두 뺨에 달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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