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자리에 있던 누군가는, 정령에게서 나온 불꽃의 잔재라도 모아 등불로 쓸 수 있겠다는 실없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물총새 탑 바다의 방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 보던 이는 적어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게끔 정교하게 만들어진 이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간에.
정령은 지금껏 줄곧 인간의 편이었다. 분명 그렇게 믿고 있었을 터인데, 어째서 갑자기 인간에게 적의를 지닌 정령과 맞서 싸워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예상치 못한 일이라는 것은 대개 이런 식이곤 했다. 섣부른 확신은 만용과도 비슷한 일이지.
여전히 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정령이, 느릿한 몸짓으로 쓰러져 움직이지 못하는 이들과 시선을 천천히 마주하였다. 위협적인 비명을 내지르며 제 몸을 크게 부풀린 두 정령이 입에서 커다란 불씨를 토해 내었다.
바람이 불었다. 이번엔, 바다 쪽에서 불어 오는 것이 아닌 바다 쪽으로 불어 가는 것.
바람에 휩쓸려 나간 불길이 선착장에 정박해 있던 선박의 잘린 뱃머리에 맞닿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혓바닥을 길게 내민, 황금빛 뱀 머리 모양을 하고 있는 찬란한 뱀 머리가 박혀 있었으나 지금은 깔끔하게 잘리고 없는 그 자리에 불씨가 옮겨 붙었다.
황금빛 단면은 불에 타올라 재가 되지 않았다. 불씨 역시, 배를 한입에 집어삼킬 생각은 없었는지 그 자리에서 커다란 등불마냥 타오를 뿐.
크게 타오르는 소리가 연료라도 되는 것인지, 배에서 우렁찬 소리가 난다. 돛대를 올리면, 배가 나아가겠지. 키를 잡을 수 있는 이가 있었던가? 글쎄. 알지 못할 일이다. 어쩌면, 자동 항법 시스템이라는 것이 작동할지도 모른다는 기록을 본 이가 있을지도 모르지. 이미 뱃머리를 잃은 배를 보고 그것을 떠올렸을지는 모르겠으나.
커다란 불씨를 토해낸 정령은 이내 제자리에서 스러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자취를 감추었다. 정령은 모종의 이유로 인간과 적대했으나, 완벽한 승리를 쟁취한 채로 불씨만을 남긴 채 유유히 사라졌다. 승자의 여유라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디로 가야 하지? 에덴의 잔재, 끝없는 어둠을 넘어 다른 곳으로. 험난한 절벽을 넘어, 혹은 빽빽한 밀림과 삼림 지대를 지나 어딘가의 다른 땅으로.
끝을 모르는 선택지 속에서 불씨가 다시 한 번 타오른다. 제법 큰 모양새로 타오르는 불빛은 어두운 밤의 끄트머리를 붉게 물들일 정도로 밝았다.
그렇다면 역시, 나아가는 수밖에 없나. 항해라는 것도, 처음 해 보는 일일 테지만 애초에 이곳에 온 후로 처음이 아닌 사안이 있기나 했던가. 정령이 알려준 길을 신뢰한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원래 지상에는 믿을 만한 일 하나 없었으니 아무렴 상관 없는 일이다. 어쩌면 이 배, 부상자를 치료할 수 있을 만큼 적당한 구호 용품을 갖추고 있을지도 모르지. 물론 정신을 다잡고 일어나 배까지 걸어갈 수 있을 때의 일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