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이다. 눈이 시리도록 눈발이 흩날리던 겨울의 찬바람이 채 가시지 않은 쌀쌀한 날. 네 번의 봄을 보내고, 다섯 번째 봄마다 돌아오는 하늘길이 열리는 날은 으레 이런 식이었다는 생각이 뺨을 스쳤다. 스무 번. 기록인이 손에 쥔 서류 뭉치는 딱 그 정도의 수를 담고 있었다. 정식 명칭은 제 20기 지상 탐사대라고 하지만, 아무 준비도 없이 덜컥 어둠 속으로 뛰어내린 용감한 이들을 – 무모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 기록인은 생각했으나 이를 글자로 옮겨 적지는 않았다. – 기리는 의미에서 0이라는 숫자가 하나 더 존재하였기에 스물 한 번째의 일이었다.
그러니, 스물 한 번. 그들이 내려간 뒤 탐사대 기념비가 세워질 것이다. 돌아오리라는 희망이 있다면 어째서 구태여 잊지 않기 위해 기념비를 세우는가에 대하여, 기록인은 이해하지 못한다. 어쩌면 이들을 내려 보내면서, 반드시 돌아오라- 라는 장황한 연설과 눈물의 인사를 나누면서도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생각 기저에 깔고 시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찰나의 의심. 제겐 지나치게 과분한 의심의 싹이 움트려는 조짐이 보임에, 기록인은 또다시 이를 글로 옮기지 않고 조용히 제 신발코로 땅을 조금 파 내었다. 패인 바닥의 흙은 신발 옆쪽에 가지런히 쌓아 두었다. 묻는다. 방금의 의심은, 그의 일에 썩 도움이 되는 생각이 못 되었으므로.
기록인이 펜을 쥐었다. 봄임에도 숨을 내뱉을 때마다 피어 오르는 입김이 제법 낯설다. 잉크가 얼지 않도록 조심해야겠군. 꽤나 시덥잖은 중얼거림이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보자, 제 20기 지상 탐사대 명단. 알파벳 순으로 차근차근 정리된 기록은 그들이 지난 십 년 간 아카데미에서 어떻게 지내 왔는지에 대한 사안을 간략하게 담고 있었다. 그 기나긴 시간을 겨우 서류 뭉치 따위에 담아낸다니 말도 안 된다. 말도 안 되는 업무를 보고 있는 것이 다름아닌 자신이라는 점에 기록인은 구태여 제게 조소를 보내지는 않았다. 그렇게 따지면 이미 백 년도 넘는 시간이나 돌아오지 않은 탐사대를 계속 내려 보내는 저희들은, 또 앞의 기수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옛적에 직감했으면서도 꾸준히 내려가는 탐사대는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을 벌이고 있나.
[ 제 22기 아카데미 입학자 명단, 곧 나온다고 하던데요. 준비 중이랍니다. ]
관청 문 앞의 자신을 스쳐 지나던 직원 둘이서 나누는 이야기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아카데미 쪽과 연계된 부서 직원인가 보군. 하나의 기록이 마무리되면, 새로운 기록이 시작된다. 기록인이 손을 놓고 있을 새는 유감스럽게도 없었다. 손을 놓게 되면 돌아오지 않는 이들에 대한 상념에 빠지게 되므로, 유감스럽다는 표현은 옳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날은 차가웠으나 봄은 봄이었는지, 구름이 군데군데 낀 것을 제외하고는 청명한 하늘에 한 톨 먼지조차도 희게 흩날려 대었다. 눈부신 날이다. 그들이 떠나고 난 뒤에는 다시금 저 하늘에도 꽃잎이 휘날리겠지. 익숙한 봄의 정경이었으나 다섯 해마다 조금은 특별하고 또 서글픈 날이 돌아옴을 기록인은 알고 있다. 그런 류의 사소한 사실은 기록하지 않는 것 또한 그의 방침이었지만.
느린 발걸음이 아직 이른 시간이라 행인이 많지 않은 길 위로 조용히 울렸다. 이런 날에 불필요한 소음은 방해될 뿐이다, 5년에 단 하루만이라도 소리를 완전히 죽여서 걸을 수 있었다면 좋으련만. 안경 위로 끼는 옅은 서리를 입으로 가볍게 불어낸 기록인이 제 글씨가 흔들리지 않도록 종이 아랫부분을 팔로 단단히 받쳐 들었다.
[ 제 20기 지상 탐사대, 아카데미 활동 종료. ]
종료라고 쓰며, 그들의 기록은 이곳에서 끝난다.
끝.
기록인이 항상 미련을 두었던.
미련.
떠나지 않은 이들이, 떠난 이들에게 갖는 무언의 감정. 혹은 그 반대의 경우에도 적용한다.
떠나는.
돌아오리라, 약속하는.
약속.
무언가를 지금 이 순간부터, 기약 없는 언젠가의 찰나까지 반드시 지켜 내리라는 다짐의 시작.
시작.
기록은 끝이나, 시간은 언제나 시작되는 법이다. 제가 서류에 찍은 마침표가 무의미함을 알고 있기에 기록인은 일부러 펜을 길게 눌러 잉크의 번짐 자국을 남겼다. 그것은 끝이었고, 미련이었으며, 떠나는 이들의 종착점이었고, 돌아오리라는 약속이 얹혀 있었으며- 또한, 시작이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