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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 산개한 별 위로 어둠의 장막이 엷게 깔렸다.

 

 성의 문이, 누군가 열지도 않았는데 저 스스로 열렸다. 성내를 가득 채웠던 꿈결과 같은 공기가 바람의 노래와 함께 성 바깥으로 빠져 나가 허공을 맴돌다 이내 스러졌다. 마냥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의지할 것은 등불뿐이다. 끝내 오늘은 해가 뜨지 않았고, 다시금 찾아온 밤과 눈 앞에 나타난 나아가야 하는 길.

 

 선택지가 두 개였다면 보다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실없는 생각이었다. 우리는 충분히, 최선의 길을 걸어왔으므로. 지나간 일에 후회하는 것은 결과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이들뿐이지.

 

 바람이 불었다.

 

 바람,

 시간을 따라 흘러가던 것.

 시간,

 여로를 행하는 이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

 필요,

 인간이 누구나 마음 속에 품고 살아가는 것.

 인간.

 길을 따라 나아가는 길에는 오는 길에 미처 보지 못하였던 옛 물건들의 잔해가 남아 있었다. 은빛 가루가 반쯤 쏟아져 금이 가 버린 유리 구슬, 굵은 뱀이 곱게도 휘감긴 낡아빠진 목재 지팡이. 초가 없어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금속 재질의 촛대와 그 옆에 나뒹굴고 있는 반파된 유리잔. 한 쪽에 나뭇잎 몇 개가 떨어져 있어 수평을 이루지 못한 천칭과 등을 잃어버린 금속 재질의 등불. 다리 한 쪽이 부서져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동그란 금속 테의 안경과 수레를 잃고 덩그러니 남은 목재 수레바퀴. 중간에 금이 크게 나 있는 수수한 손거울과, 낡아서 더 이상 소리를 내지 못하는 가느다란 목재 피리.

 

 성문의 옆에는, 화려한 장식이 들어간 단검이 하나 꽂혀 있었다.

 그러나 승부를 끝낸 이에게 새로운 무기는 구태여 필요 없겠지.

 성 바깥에 깔린 것은, 끝없는 어둠이 아닌 끝이 보이기 시작한 어둠. 저 너머로 지평과 맞닿은 선이 희미하게 보였다. 옅게 깔린 달빛은 인간의 등불만큼 밝지는 않았으나, 분명 에덴에서 보던 것과 비슷하다는 특유의 정감 비스무리한 것이 또 있다.

 인간은 승리하였다. 그리하여, 백여 년간 빼앗겼던 시간과 빛을 되찾았으니.

 밝지 않던 밤이 서서히 밝아 왔다. 아침의 해를 마주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시간이지만, 빛을 찾는 데에 공들인 세월의 여로를 생각하면 그런대로 나쁘지만은 않은 기다림이다. 기다리는 것에는 익숙해진 이들이었으므로.

 한 갈래로 난 길을 따라 걸어 나갔다. 성채 안에서 잘까, 하기에는 격전을 치르지 얼마 되지 않은 처라 썩 내키지 않는 것 같기도. 웨리스에는 멀쩡한 건물들이 많았었지. 일단 밤을 적당히 지새고, 날이 밝으면 새로운 목적지를 정해 볼까. 저마다의 미래가 하나의 길 위에서 엉켜 들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있는 것은.

 인간의 발은 자고로 어디나 갈 수 있는 류의 것이라, 그 눈이 보고 있는 것 이상으로 어디까지고 나아갈 수 있다 했던가.

 그 말,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던 모양이지.

 [ 서탑에서는 에덴의 경치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

 이곳의 지평에 맞닿았어야 할, 그러나 그간 줄곧 그러지 못해 왔던.

 서쪽의 높은 탑이 어둠에 잠겨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걸음에 녹아 드는 것은 찰나의 가벼움. 순간의 유쾌함. 잠시의 행복.

 달을 반쯤 가리었던 구름이 걷혔다. 맑은 달빛이 익숙한 지형을 저 멀리서 비추었다.

 높은 곳에서 한눈에 보는, 새로 찾아온 봄의 정경.

 에덴에 남은 이들이 항상 그리워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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