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창을 두드리던 눈발이 멎은 지 오래였다. 오래였던가? 글쎄, 여정의 내내 창 바깥쪽만 줄창 내다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니 오래였다든지 얼마 안 되었다든지 하는 시간을 가늠하기 마땅치만은 않다. 제법 낡은 선로를 달리고 있었던 탓에 덜컹거리던 감각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거친 계절이 끝나 간다는 의미의 표지. 새카만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여전하였으나, 열차 안의 등불에 의존하여 바깥을 보면 그 새하얬던 대지에 비해서는 채도가 올라간 풍경이 눈에 가득 들어찼다.
이 모든 색채를 뒤덮고 있는 어둠의 욕심을 빼앗으면, 더 확실히 볼 수 있었을 테지. 제법 실없는 생각을.
열차가 제자리에 온전히 멈추어 섰다. 치이익, 하는 느긋한 소리가 종착지에 도착하였음을 안내하는 듯 했다. 누구도 열지 않았으나 열차가 멈춤과 동시에 느릿하게 열린 문이 다음 행선지를 향한 길을 터 주었다. 이곳에 남는다는 선택지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굳이 열어 주지 않았더라도 제 손으로 열고 나갔을 터이지만 그래, 아무렴 좋다고 해 두자.
빛의 신이라는 이의 축복을 받은 꽃의 대지. 빛이 이미 어둠에 집어삼켜진 이후인 지금 그의 축복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혈관에 문신마냥 남은 축복은 끊임없이 내려오고 있다.
빛 한 점 없는 새카만 하늘. 한 발짝을 내딛자마자 코끝에 마구잡이로 엉겨 붙는 상쾌한 향과 그가 지나간 후에 미미하게 감도는 알싸한 잔향. 뱃머리에 부딪히는 파도마냥 손끝에서 부서진 여름을 지나, 늦가을 한낮 찰나의 꿈처럼 이마를 스쳐간 가을의 바람을 지나. 차가운 철로에 닿아 그대로 얼어붙은 성에를 밟아 으스러트린 겨울을 지나서 도착한 곳.
만물이 피어나는 계절에, 모든 생이 제 숨을 틔우는 대지.
빛이 없음에도 꽃이 자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겠으나,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현실로 끌어오는 것이 봄이라면 봄이었다. 봄의 달 중 하나를 관장하는 신에 의해 세상이 버림받았다는 설이 내려오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생명이 끊임없이 움트고 있는 시작의 땅. 인간의 시간을 신이 부수었을지언정, 자연의 시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흘러가고 있다. 언젠가 다시 움직이게 될, 인간의 시계바늘을 기다리며 그리도 마냥.
따뜻한 기운이 어깨에 달라붙었다. 발끝에 밟히는 것은, 가느다란 모래도 고운 흙도 얼어붙은 눈도 아닌 개화기를 지나 다음 생을 준비하려 떨어져 내린 꽃잎.
이야기의 마지막, 이라 칭하기에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계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