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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지금껏 문명을 이루며 몇천 년 간 살아 왔다.
네 개의 계절이 조화를 이루고 돌아가는 세계.
빛의 신 일루멘의 축복을 받았다는 봄의 부족, 웨리스 (vēris)
불의 신 이그니사의 화신이 마음 한구석에 깃들었다는 이야기가 내려오는 여름의 부족, 아이슈타트 (Aestat)
풍요의 신 페라싯이 땅을 밟아 비옥한 대지를 얻었다는 속설이 있는 가을의 부족, 메슈라 (Messura)
별의 신 노스트라이아의 인도 끝에 하나로 모였다는 겨울의 부족, 퀴에스 (Quĭes)
각 계절만이 존재하는 네 지역이 있었고, 그들은 서로 다른 부족적인 특성과 문화를 이루어 나가며 평화롭고 안정적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그 네 개의 지역, 세계 전체의 심장부에는 에덴이라 불리는 인류의 낙원이 존재하였다.
사계절이 순환적으로 존재하는 광장 형식의 자그마한 도시.
자신의 계절에 싫증난 이들은 그곳으로 이주하였다가 눌러앉기도 하였고, 특정 계절만을 원했던 이들은 그곳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지역마다 원하는 것이 다르니 서로 부딪힐 이유가 없다. 원하는 것이 있는 지역으로 가서 터를 잡고 살아가기 시작하면 그만이다.
욕망이 부딪히지 않으니 전쟁 따위를 일으켜 무의미한 희생을 일으킬 이유 같은 건 없다.
이 세계의 인류는, 완전한 평화의 상태를 수천 년 간 지속해 오고 있었다.
간혹 각 계절에 맞지 않는 재해가 일어나곤 하였다.
믿었던 자연에게 배신당할 때마다 인간은 신을 찾았다.
신은 인간의 소리를 들었다.
재해는 가끔씩 잊을 만하면 일어났고, 인간은 신을 잊지 않았으며, 신 역시 인간을 저버리지 않았다.
나는 저들에게 힘을 선사했다! 헌데 저들은 왜 더욱 강해지려 들지 않는 거냐?
힘을 손에 넣었으니 욕망 또한 생겨나야 하는 법. 어째서 더 강한 힘을 추구하지 않지?
밤에 길을 잃은 인간은 별의 신에게 기도하였다.
가까운 이가 죽은 인간은 그들의 안녕을 죽음의 신에게 기원하였으며
생명의 신에게는 새로운 삶을 구가하였다.
날이 좋지 않아 바깥에 나가지 못한 인간은 내일은 날이 개기를 빛의 신에게 기도하였다.
농사를 짓는 인간은 올해의 농사가 무탈하기를 물의 신에게 빌었으며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풍요의 신에게 기원하였다.
새로운 아이가 태어난 지붕 아래의 인간은 아이가 선하게 자라기를 정의의 신에게 기도하였다.
추운 날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가엾은 인간은 불의 신에게 따뜻함을 구가하였다.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 직책을 맡은 인간은 지혜의 신에게 새로운 지식을 구가하였다.
하루를 온전히 마친 인간은 오늘 하루도 무사히 흘러가 밤에 도달하였음을 어둠의 신에게 감사하였다.
전쟁을 하고 싸워 가며 타인의 것을 쟁취할 일이 없었던 인간은 힘의 신을 찾지 않았다.
항상 평화로운 상태에 머물러 있던 인간은 평화라는 상태를 망각하여 평화의 신을 더 이상 찾지 않았다.
그것은 저들이 오롯한 평화를 이루어 내었기 때문이다.
욕망이 결여된 인간은 도태된 인간이다! 저 상태로는 영영 발전을 이루어 낼 수 없겠지.
변화할 수 없이 단지 머무르기만 하는 인간은 언어가 없는 짐승보다도 못한 것.
인간의 시간은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도태된 이들의 움직이지 않는 시간을 나, 위르셸의 이름으로 이곳에서 한 번 부순다.
강한 힘을 원하지 않는 인간이 이루어낸 평화는 욕망의 추구가 결여된 평화였다.
그 부족함을 차마 인정할 수 없었던 힘의 신 위르셸은 인류가 수천 년 간 살아온 세계의 시간과 이룩해 온 평화를 무력으로 부수었다.
어둠의 신에게 하루의 안녕을 빌고 잠자리에 든 인간의 시간은 그 자리에서 멈추어 버렸기에 다음 날의 빛은 찾아오지 않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의 인간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그 자리에서 서서히 굶주려 죽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생명은 태어나지 않는다. 새로운 빛은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다.
일어나거라, 나의 아이야.
이 세계는 오늘 밤 종말을 맞이한다. 더 이상 인간은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될 것이야.
네가 밟고 선 곳은, 그리고 내가 밟고 선 이 곳은 더 이상 이 땅이 아니게 된다.
에덴의 땅은 하늘로 떠올라 공중의 마지막 요새가 될 것이다.
어둠이 내리깔린 세계에서 너희가 마지막 빛이 되거라.
그리하여 그 작은 빛의 불씨로 세계의 부활을,
인류는 변화할 수 있는 존재이며 세계를 다시 한 번 창조할 수 있는 존재임을ㅡ
스스로 선언하거라.
에덴의 모든 시민이 그날 밤 꿈 속에서 들은 목소리.
다음 날 아침, 에덴은 공중으로 떠올랐다. 길이 없기에 섣불리 올라올 수 없고, 또한 내려갈 수도 없다.
인류의 마지막 공중 요새가 된 곳에서는 어둠이 내리깔려 더 이상 무엇도 살지 못하는 폐허의 땅이 내려다 보일 뿐이다.
그로부터 봄이 다섯 번 돌아올 때마다, 하늘의 에덴으로부터 지상으로 내려가고 지상으로부터 에덴으로 올라올 수 있는 길이 딱 하루 열리곤 했다.
그들은 그 날을 '하늘길이 열리는 날'이라 명명하였다.
그 길을 따라 내려가면 언젠가는 지상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신탁을 받은 평화의 신관들은
곧바로 흥분하여 소수 정예로 구성된 탐사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모두의 희망을 안고 출발한 첫 번째 탐사대에 대한 소식은 이후 다시는 들을 수 없었지만,
다음 하늘길이 열리는 날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탐사대를 보며
이제는 미지의 어둠이 되어 버린 고향을 되찾기 위한 탐사대를 본격적으로 꾸려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났다.
탐사대 양성을 위한 학교가 생겨났고, 최대한 다양한 재능을 가진 이들이 함께 내려가면 좋겠다는 판단 하에 직업별 길드가 생성되었다.
제법 그럴듯한 탐사대의 체계가 잡혀 나가기 시작한 것은 이로부터 봄이 몇 번이고 더 돌아온 뒤의 일이다.
이 이야기는 이 전설과도 같은 날부터 정확히 백 년이 되는 해,
인류의 마지막 공중 요새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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